박정희 대통령 기념 사업회 (취 지 문)
새 천년의 문턱에서 뒤돌아본 우리의 20세기는 밝음과 어둠이 극명하게 교차한다. 세기의 전반은 일제 압제, 동족 상잔 등 비극의 연속이었고, 후반은 근대화가 뿌리내리면서 민족 웅비의 바탕을 구축한 영광의 역사였다. 그 영광의 한가운데 대통령 박정희가 있다.
박 대통령은 ‘조국근대화’ 역사 그 자체다. 역사는 시대의 숲을 보는 일일진대, 조국근대화는 이 땅에 세 가지 ‘숲’을 추구했고 또 그것에 성공한 역사였다. 라인강의 기적을 선망한 끝에 박 대통령은 수천년 동안 절대가난에 시달려온 민초를 구하는 길이 ‘공장 굴뚝의 숲’과 ‘안테나의 숲’을 가꾸는 데 있고, 한편 가난한 국민만큼이나 헐벗은 국토를 가꾸는 길이 ‘나무의 숲’ 실현에 있다고 확신한다.
공업입국정책은 이 땅에 공장 굴뚝의 숲을 이룩했고, 그 효과로 다수 국민들이 가난을 벗어나 중산층을 자처하게 되니 그 상징이 바로 안테나의 숲이다.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인 외지(外紙)의 논평대로 마침내 “단 한 세대 안에 넝마주이에서 신흥부자로 비약한 나라”가 되었다.
더해서 박대통령의 신앙과 같았던 녹화(綠化) 집념으로 산하(山河)는 푸르름을 되찾는다. 이로 말미암은 치산치수 성공과 자연재해 해방의 역사 역시 동서고금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역사(役事)였다. 치산치수는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져 주곡(主穀)자급과 농공(農工)병진의 가능성을 정착시킨다.
‘은둔의 소국’이던 이 나라가 세기말에 불어닥친 지구적 바람인 세계화전략을 경영할 만한 토대를 얻은 것도 조국근대화 과업의 일환인 수출입국정책의 공덕이다. 미국 백악관 앞에 세워진 한국전 참전기념비 후면에 “우리(참전 16개국)의 젊은이들은 한 번도 이름 들어본 적 없는 땅에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을 위해 싸웠다”는 비문이 말해주듯, 불과 반 세기 전은 세계 속의 절해고도에 다름 아닌 우리였음에 견주어 오늘의 처지는 세계 무역 10대국의 반열에 들었으니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극치가 이 아니겠는가.
박대통령은 국부증대가 이 나라 국체(國體)를 지키고 한민족의 정통성을 제고하는 지름길이라 믿었다. 헐벗고 굶주리는 국민에게서 애국심을 기대할 수 없을 터인즉 이념이 양극화된 한반도 상황에서 국민경제의 고도 성장은 가까이는 대한민국 안보증대책으로, 장차는 통일대비책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조국근대화의 핵심 치적은 보릿고개가 연례 행사였던 우리 사회에 ‘가난으로부터의 자유’를 안겨다준 일이었다. 산업화를 이루려는 경제제일주의가 ‘개발독재’였다는 일각의 비판은 역사가 오늘의 시점에서 내리는 과거 평가이기도 한 점에서 그 입지(立地)를 부정할 수 없겠지만, 마찬가지로 한국전 참전비 전면에 새긴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는 경구(警句)대로 민주화 유보는 가난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한 불가피한 대가였다는 시각도 정당하게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국민경제 성장과 함께 널리 고양된 “우리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국민의식은 어느새 민주의식으로도 자라나 민주제도의 본격화를 요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적절히 수용해야 할 시점을 놓친 아쉬움은 남는다. 도시·산업화가 배태하고 있던 민주화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해 프랑스혁명이 발생한 전례를 거울 삼아, 역사로부터의 배움은 현실을 이상 쪽으로 접목시키는 당위론임에 비추어, 근대화의 두 축인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실현하는 역사적 시도도 했음직하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아쉬움이 한민족 5천년 역사 초유의 치적을 결코 허물지 못한다. 한 집안이 부귀(富貴)를 누리려 해도 최소 삼대(三代)의 적공(積功)이 있어야 한다 했거늘 하물며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그것도 한 세대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서구 2백년 역사의 산업화를 압축적으로 이룬 것은 미증유의 대업이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아쉬움이 있다 해서 위업(偉業)을 외면한다면 이는 흑백논리의 맹종(盲從)일 뿐이다.
여기 박 대통령의 행적을 증거하고 이를 역사의 제자리에 올려놓고자 뜻을 모아 기념사업회를 발족한다. 박 대통령의 역사를 말하지 않고 우리 현대사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발족 논의만 분분하던 기념사업은 김대중 대통령의 동의(動議)로 마침내 국가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김 대통령의 대화합(大和合) 의지가 바탕이 되어 대희년(大禧年, 밀레니엄)인 새 천년의 도래를 앞두고 몸소 보여준 균형 잡힌 역사관의 발로인 것이다. 과거사(過去事) 부정 일변도로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일부 파행적 관행을 바로잡는 상징적 시발이며, 곁들여 기념사업의 정당성도 한결 배가(倍加)된다는 점에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념사업은 과거의 유물적 재현이 아닌 미래지향적 시각에서 ‘박정희학(學)’을 정립하고 전개하는 데 진력할 것이다. “근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믿음이다. 우리 사회가 진입하고 있는 정보사회 또는 후기산업사회는 곧 근대화의 성숙이요, 북한 등 다수 제3세계가 계속 노심초사하는 바가 근대화 궤도의 진입이기에, 그만큼 박 대통령의 국가경영방식은 앞으로도 오래 국내외적 교훈으로 뚜렷하게 기능할 것이다.
이제 박 대통령을 배우고 기리려는 시민의 광범위한 동참을 기대한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한(恨)을 당대발복(當代發福)의 원동력으로 반전(反轉)시켰던 박 대통령의 혜안과 기백을 대국(大局)적으로 평가하는 시민들의 공감과 동참은 박정희학을 통해 다가올 새 천년의 우리 미래가 영광의 역사로 더욱 비상할 수 있는 기틀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1999년 7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명예회장 金 大 中
고 문 金 鐘 必
회 장 申 鉉 碻
부회장 權 魯 甲 金 用 煥 朴 槿 惠
감 사 徐 奉 均
이 사 姜 汶 奎 具 常 權 泰 埈 金 準
金 瓊 元 김 상 0 金 聖 鎭 金 壽 鶴
金 玉 均 金 在 哲 金 正 濂 金 埈 成
金 昌 星 孫 炳 斗 吳 고 山 王 相 殷
柳 琦 諪 李 基 鐸 李 昇 澤 李 연 淑
李 永 根 李 義 根 李 海 元 張 英 信
張 志 良 張 泰 玩 鄭 光 模 鄭 鎭 肅
池 德 玄 勝 鐘
( 이상 가나다 순, 존칭생략 )